95마리 병아리의 비밀, 카카포 유전체는 뭐라고 답했을까

The Finch2026. 4. 17.

95마리 병아리의 비밀, 카카포 유전체는 뭐라고 답했을까

뉴질랜드 고유종 카카포. 세상에서 유일하게 날지 못하는 앵무새이자 가장 무거운 앵무새. ⓒ Mnolf /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2026년 봄, 뉴질랜드 앞바다의 이름도 낯선 작은 섬들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전 세계에 약 236마리밖에 남지 않은 멸종위기 앵무새 카카포가 한 번식기에만 95마리 넘는 병아리를 낳은 겁니다. 이전 최고 기록이 2019년의 73마리였으니, 단숨에 모든 기록을 갈아치운 셈이죠.

그런데 이 소식을 접한 진화생물학자들이 주목하는 포인트는 "몇 마리가 태어났느냐"가 아닙니다. "이 새가 도대체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 있느냐"입니다. 날지도 못하고, 번식도 몇 년에 한 번 하며, 인류가 도착한 뒤로 개체수가 바닥까지 내려간 새가 멸종하지 않고 버틴 일. 그 답은 카카포의 진화사와 유전체에 숨어 있습니다.

왜 4년에 한 번만 번식할까

카카포의 번식 스위치를 켜는 건 짝짓기 상대가 아니라 나무 한 종류입니다. 리무⁠(Dacrydium cupressinum)⁠라는 뉴질랜드 토종 침엽수인데요. 이 나무는 매년 열매를 맺지 않고, 3~5년 주기로 한꺼번에 엄청난 양의 열매를 쏟아내는 "대결실⁠(mast fruiting)"을 합니다. 2026년 봄은 뉴질랜드 과학자들이 세 번식 섬 전체에서 50~60% 수준의 리무 대결실을 예측했고, 실제로 그 예측이 맞아떨어진 해였죠.

카카포는 이 대결실이 없으면 번식을 거의 시도하지 않습니다. 대결실이 있어야 병아리를 키울 만큼의 고지방 열매가 확보되기 때문인데, 문제는 이런 해가 2~4년에 한 번 찾아온다는 점입니다. 즉 카카포가 "짝짓기에 관심이 없는 새"처럼 보이는 건 게을러서가 아니라, 2000만 년 가까이 리무 같은 토종 식물의 리듬에 생활사를 맞춰 진화해온 결과라는 뜻입니다.

리무 나무 가지에 달린 작은 열매. 카카포의 유일한 번식 트리거이자 병아리를 키우는 고지방 먹이가 된다. ⓒ Krzysztof Ziarnek, Kenraiz /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날개를 버린 새, 섬 증후군의 교과서

카카포를 보면 "저게 정말 앵무새 맞나" 싶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몸무게 2~4kg. 앵무새 중 가장 무겁죠. 얼굴은 올빼미를 닮았고, 다리는 굵고 튼튼합니다. 그리고 날개가 있긴 한데 날지 못하죠. 왜 이렇게 됐을까요?

생물학에서는 이런 모습을 "섬 증후군⁠(island syndrome)"이라고 부릅니다. 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섬은 포유류 포식자가 들어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뉴질랜드가 대표적인데요. 약 8000만 년 전 곤드와나 대륙에서 떨어져 나온 뒤 포유류가 거의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포식자가 없으면 날아서 도망칠 필요가 없고, 가벼운 몸을 유지할 이유도 사라집니다. 그래서 섬의 새들은 날개 근육을 줄이고, 몸집을 키우고, 바닥 생활에 적응하는 방향으로 진화하죠.

카카포도 그 길을 따라갔습니다. 위협이라고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대한 하스트수리 정도였으니 낮에는 조용히 숨고 밤에만 움직이는 야행성 습성을 발달시켰고, 깃털은 이끼 색 바탕에 얼룩이 있어 숲 바닥에서 거의 보이지 않게 됐습니다. 다리는 튼튼해져서 나무를 오르내릴 수 있게 됐죠. 문제는, 이 모든 "섬 맞춤 설계"가 인간이 데려온 쥐·족제비·고양이 앞에서는 그대로 약점이 됐다는 점입니다. 유럽인이 도착한 19세기 이후 카카포 개체수는 수만 마리에서 단 51마리까지 추락했습니다.

카카포 특유의 초록 얼룩무늬 깃털. 숲 바닥에서 위장하기 위해 진화했지만, 인간이 들여온 포유류 앞에서는 그대로 약점이 됐다. ⓒ Mnolf /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169마리 유전체가 밝힌 뜻밖의 결과

여기서 재밌는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보통 집단유전학 교과서는 개체수가 수십 마리 수준으로 줄면 근친교배가 심해지고, 유해한 돌연변이가 쌓이면서 번식력과 건강이 나빠진다고 가르칩니다. 이른바 "멸종 소용돌이⁠(extinction vortex)"죠. 카카포는 이 시나리오의 교과서 사례가 될 법했습니다.

그런데 2023년 구흘린⁠(Guhlin) 연구팀이 2018년 당시 살아 있던 카카포 169마리의 유전체 거의 전부를 해독해 Nature Ecology & Evolution에 발표한 결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뉴질랜드 본토에서 포식자에게 쫓겨 절멸한 개체들과 비교해보니, 지금 섬에 남은 카카포 집단이 오히려 유해 돌연변이를 더 적게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이게 왜 의미 있는 숫자냐면, 본토 집단은 수천 마리 규모였고 섬 집단은 지금 200마리대입니다. 이론대로라면 훨씬 작은 섬 집단 쪽에 나쁜 돌연변이가 더 쌓여 있어야 하죠. 그런데 정반대였습니다. 연구팀은 이걸 "유전적 정화⁠(purging)"라고 설명합니다. 작은 집단에서는 근친교배가 늘어나면서 치명적인 열성 돌연변이가 "두 벌"로 발현될 확률도 같이 올라가는데, 그런 개체는 대부분 번식하지 못하고 사라집니다. 세대를 거듭하면서 진짜로 해로운 변이가 집단에서 빠져나가는 셈인 거죠.

물론 이게 "작은 집단이 오히려 좋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정화 과정에서 운 나쁜 개체들이 죽어 나가고, 다양성 자체는 계속 깎이고 있습니다. 다만 카카포가 51마리에서 다시 수백 마리로 회복될 만큼 번식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가 이 유전사의 우연 덕분이라는 뜻입니다.

카카포 새끼는 손으로 먹이를 받는 등 한 마리 한 마리 집중 관리를 받는다. 모든 개체의 혈액·깃털 시료가 곧 유전체 데이터베이스로 들어간다. ⓒ Department of Conservation NZ / Wikimedia Commons (CC BY 2.0)

Kākāpō125+ 프로젝트, 유전체로 짝을 맞추다

2026년 번식 대풍작 뒤에는 리무 나무 말고 또 하나의 주인공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카카포의 유전체를 해독해 관리에 활용하는 Kākāpō125+ 프로젝트입니다. 이름은 2018년 시점 125마리가 확인된 데서 따왔는데, 지금은 훨씬 더 많은 개체가 포함돼 있죠.

뉴질랜드 환경보전부⁠(Department of Conservation)⁠와 오타고 대학 연구팀은 이 유전체 데이터를 활용해 "어떤 수컷과 암컷을 어느 섬에 함께 둬야 유전적 다양성이 가장 잘 보존되는가"를 계산합니다. 실제로 번식 성공률과 성장률에 관련된 변이가 유전체의 특정 구간에 몰려 있다는 것도 확인됐고, 이걸 근거로 알 부화율이 낮은 계통에는 다른 유전적 배경의 수컷을 붙이는 식의 미세 조정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2026년 대풍작이 흥미로운 건, 리무 대결실과 이 유전체 기반 페어링이 처음으로 정면으로 맞물린 해였다는 점입니다. 암컷 거의 전부가 둥지를 틀었고, 알의 수정률과 부화율도 이전보다 유의미하게 올라갔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컴퓨터로 관리하는 야생동물" 같은 그림이지만, 정작 스위치를 켠 건 여전히 리무 나무의 기분이었다는 대목이 카카포다운 구석이죠.

환경보전부 자원봉사자가 카카포 새끼의 체중을 측정하고 있다. 이렇게 모인 성장·번식 데이터가 Kākāpō125+ 유전체 관리에 통합된다. ⓒ Department of Conservation NZ / Wikimedia Commons (CC BY 2.0)

95마리 병아리가 던진 질문

2026년의 95마리는 단순히 "아주 잘된 번식기"가 아닙니다. 리무가 약 20% 더 많이 열매를 맺었을 때 카카포 개체수가 얼마나 뛸 수 있는지를 실제로 보여준 자연 실험이자, 고도로 관리된 유전적 다양성이 실제 번식 성공으로 이어지는지를 처음으로 대규모로 검증한 사건인 셈입니다.

앞으로 이 병아리들 가운데 얼마나 살아남을지, 성체가 된 뒤에도 기존 계통과 겹치지 않는 유전적 기여를 할 수 있을지는 다음 번식 주기에 가서야 드러납니다. 그때까지 기다리는 게 이 새의 방식이죠. 짝짓기도, 회복도, 몇 년에 한 번 나무가 열매를 맺어야 움직이는 새. 우리가 바라는 속도가 아니라, 카카포의 속도대로.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앵무새는 지금도 그 리듬으로 살아가는 중입니다.

참고문헌

1. Guhlin, J. et al., "Species-wide genomics of kākāpō provides tools to accelerate recovery", Nature Ecology & Evolution, 2023. doi:10.1038/s41559-023-02165-y

2. Dussex, N. et al., "Population genomics of the critically endangered kākāpō", Cell Genomics, 2021. doi:10.1016/j.xgen.2021.100002

3. Department of Conservation New Zealand, "Kākāpō breeding season officially underway", Media release, 6 January 2026.

4. Department of Conservation New Zealand, "Kākāpō125+ gene sequencing project", doc.govt.nz/our-work/kakapo-recovery.

5. Foster, J. B., "The evolution of mammals on islands", Nature, 1964. (island syndrome 원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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