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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빛이 선명한 이이위(Drepanis coccinea). 하와이 마우이섬 할레아칼라 국립공원의 호스머 그로브에서 촬영된 이 새는 곡선형 부리로 토종 꽃의 꿀을 빨아 먹습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CC BY-SA 2.0) / Kanalu Chock
1885년 하와이섬 마우나로아 화산이 폭발했습니다. 흘러내린 용암은 토종 숲을 통째로 덮어버렸지만, 다 태우진 못했죠. 군데군데 살아남은 작은 숲 조각이 검은 용암 들판 사이에 섬처럼 떠 있게 됐는데요. 하와이 사람들은 이 숲 섬을 키푸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바로 이 키푸카가 오늘날 지구상 어디에도 없는 작은 새들의 마지막 피난처가 됐죠.
이 새들이 바로 하와이 꿀빨이새, 영어로는 하와이언 허니크리퍼입니다. 모기가 올라오지 못하는 해발 1,500m 이상의 고산지대에 살면서, 길쭉하게 휜 부리로 토종 꽃의 꿀을 빨아 먹죠. 한때 50종이 넘게 번성했지만, 외래종 모기와 조류 말라리아 때문에 지금은 17종 남짓밖에 안 남았습니다. 그것도 대부분 멸종 위기죠.
그런데 2026년 봄, 이 작은 생존자들에게서 좀 황당한 행동이 발견됐습니다. 옆집 둥지에서 나뭇가지를 훔쳐 자기 둥지에 갖다 붙이고 있었던 거예요.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이야기는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리버사이드 캠퍼스의 곤충학자 에린 윌슨 랭킨(Erin E. Wilson Rankin) 박사 연구팀이 던진 한 가지 질문에서 시작됐습니다. 새들이 둥지를 짓는 과정을 GPS로 정밀하게 따라가 보면, 우리가 모르던 행동이 잡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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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GPS로 추적한 216개 둥지 중 39개에서 발견된 둥지 재료 절도 행위 도식. 도둑새가 옆집 둥지에서 나뭇가지를 빼내 자기 둥지로 가져가는 동선을 보여줍니다. ⓒ The Finch
연구팀은 하와이섬의 키푸카 숲에서 꿀빨이새 216개 둥지에 GPS 추적 장치를 달았습니다. 그리고 결과를 정리해 2026년 학술지 《아메리칸 내추럴리스트》에 발표했죠. 둥지 39개에서 도둑질 현장이 잡혔습니다. 무려 18%죠. 그것도 다 한 종 안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이위(ʻiʻiwi), 아파파네(ʻapapane), 그리고 황금빛 깃털을 가진 종까지, 세 종이 서로의 둥지를 가리지 않고 털었습니다.
이 행동에는 둥지 재료 절도 기생, 학술 용어로는 네스트 머티리얼 클렙토파라시티즘(nest material kleptoparasitism)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요. 다른 새의 둥지에서 재료를 훔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랭킨 박사는 자신들도 깜짝 놀랐다고 말했죠. 지금까지 노래하는 새 40종 이상에서 이런 절도가 일화처럼 보고된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숫자로 정리된 연구는 처음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왜 굳이 훔치는 걸까요. 잘 생각해 보면 답이 보입니다. 둥지 짓기는 정말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먼저 작은 나뭇가지를 부리로 부러뜨려 바닥을 깔고, 컵 모양으로 정교하게 엮은 다음, 그 안쪽을 더 가늘고 부드러운 재료로 덧대야 합니다. 알을 따뜻하게 품으려면 단열도 잘 돼야 하죠.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어떤 재료가 좋은지 아는 경험이 동시에 필요한 작업입니다.
이 연구의 또 다른 저자인 미국 매사추세츠 휘튼 대학의 조류 생태학자 제시 놀튼(Jessie Knowlton) 박사는 데이터에서 흥미로운 패턴을 찾아냈습니다. 꿀빨이새가 둥지를 터는 시점이 우연이 아니었다는 거죠. 이들은 평소 먹이를 찾는 높이와 똑같은 높이의 둥지에서만 재료를 훔쳤습니다. 자기가 늘 다니던 길목에 마침 빈 둥지가 있으면, 살짝 들러서 챙기는 식이었다는 얘기입니다.
놀튼 박사는 이걸 자연선택이 빚은 효율 전략이라고 정리했습니다. 새 가지를 찾아 멀리 날아갈 필요도, 부리로 따로 가공할 필요도 없으니, 둥지 짓는 데 드는 에너지와 위험을 한꺼번에 줄일 수 있죠. 어린 새일수록 둥지를 잘 못 짓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종의 학습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일리노이 대학교 어배너 섐페인 캠퍼스의 보전생물학자 제프 브론(Jeff Brawn) 박사는 좋은 재료를 골라내는 안목 자체가 시간과 기술을 요구한다고 설명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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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처음부터 둥지를 짓는 데 드는 에너지와 옆집 둥지에서 재료를 훔칠 때의 비용을 비교한 도식. 시간, 에너지, 천적 노출, 기생충 감염 위험이 양쪽 저울에 올라가 있습니다. ⓒ The Finch
그렇다면 도둑질에는 위험이 전혀 없을까요. 그건 또 아닙니다. 연구에 따르면 털린 둥지 39곳 중 5곳은 그때까지도 부모 새가 알이나 새끼를 품던 활성 둥지였습니다. 그중 2건은 도둑이 다녀간 직후 부모가 둥지를 버렸고, 새끼는 살아남지 못했죠. 즉 약 5%의 절도 행위가 그대로 둥지 실패로 이어진 셈입니다. 빈 둥지에서 훔치는 경우도 안전하지만은 않습니다. 미국 노스텍사스 대학교의 보전생물학자 제임스 베드나즈(James C. Bednarz) 박사는 이전 번식 시도에서 남은 깃털 진드기나 깃 이가 새 새끼에게 그대로 옮겨갈 수 있다고 지적했죠. 결국 모든 게 비용 편익 분석이라는 거예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왜 다른 새들보다 하필 하와이 꿀빨이새들이 이런 행동을 더 자주 보일까요. 베드나즈 박사는 그 답을 키푸카라는 환경 자체에서 찾았습니다. 용암으로 잘게 쪼개진 숲에서는 좋은 둥지 재료를 찾는 게 더 어렵죠. 이런 곳에서는 훔치다 들킬 위험보다, 재료를 못 구해 둥지를 완성하지 못할 위험이 더 클 수 있다는 분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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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파네(Himatione sanguinea). 진홍색 깃털과 검은 부리가 특징인 토종 꿀빨이새로, 이번 연구에서 도둑새인 동시에 피해자로 자주 관찰됐습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CC0) / Alan Schmierer
하와이 꿀빨이새들의 조상은 약 570만 년 전, 카우아이섬과 니이하우섬이 막 바다 위로 솟아오를 무렵 아시아에서 날아온 한 작은 핀치였습니다. 2011년 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에 실린 헤더 러너(Heather R. L. Lerner) 박사 연구팀의 분석은 이 한 마리의 후손이 섬을 옮겨 다니며 50종 넘는 꿀빨이새로 폭발적으로 갈라졌다는 사실을 보여줬죠. 부리 모양도 새마다 제각각이 됐고요. 적응방산이라 부르는 이 진화의 교과서 같은 사례가 지금 우리가 보는 꿀빨이새들입니다.
그런데 화려한 진화의 끝자락에 서 있는 이들 앞에는 기후 변화, 질병, 외래종이라는 거대한 벽이 줄지어 있습니다. 따뜻해진 날씨가 모기를 산 위로 밀어 올리고, 폭풍이 둥지를 부수고, 외래종 쥐가 알과 새끼를 노리죠. 거기에 더해, 이웃이 들이닥쳐 둥지 재료까지 빼앗아 가는 겁니다. 놀튼 박사는 이걸 이들이 짊어진 또 하나의 도전이라고 표현했죠.
참 묘한 풍경 아닌가요. 한쪽에서는 수백만 년에 걸친 적응방산이 만들어 낸 정교한 부리로 꿀을 빨고, 다른 한쪽에서는 옆집 둥지에서 잔가지 하나라도 더 챙기려 부지런히 오간다는 거죠. 자연선택이 빚어낸 두 얼굴이 같은 새 안에 공존하는 셈입니다. 다음에 작은 새가 부리에 나뭇가지 하나 물고 있는 모습을 보거든, 그게 어디서 온 가지인지 한 번쯤 의심해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1. Wilson Rankin, E. E., Knowlton, J. L., Flaspohler, D. J., & Rankin, D. T. (2026). "Upcycling in the Hawaiian Islands: Native Forest Birds Commonly Engage in Nest Material Kleptoparasitism." The American Naturalist. DOI: 10.1086/740144
2. Lerner, H. R. L., Meyer, M., James, H. F., Hofreiter, M., & Fleischer, R. C. (2011). "Multilocus Resolution of Phylogeny and Timescale in the Extant Adaptive Radiation of Hawaiian Honeycreepers." Current Biology, 21(21), 1838-1844. DOI: 10.1016/j.cub.2011.09.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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