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에서 1시간 안에 피를 옮기는 사람, 그리고 멈춰버린 그의 연구실

The Finch2026. 5. 13.

전장에서 1시간 안에 피를 옮기는 사람, 그리고 멈춰버린 그의 연구실

2022년 4월, 폴란드 트르제비엔에서 미군 의무병이 수혈 훈련을 시연하는 모습. 전장에선 피 한 봉지가 생사를 가른다.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 U.S. Army National Guard, Spc. Hassani Ribera Soto

총상이나 폭발 상처를 입은 사람이 살아남느냐 죽느냐는 첫 1시간 안에 갈립니다. 미군 전장의학 데이터에 따르면, 외상 후 60분 안에 수혈을 받은 환자는 생존율이 눈에 띄게 높아지죠. 이른바 골든아워⁠(golden hour)⁠인데요. 문제는, 이 1시간을 지키는 게 도시 응급실에서도 빠듯하다는 점입니다. 하물며 적의 사격을 받으며 함정에서 해병대 분견대까지 피 한 봉지를 옮겨야 한다면 어떨까요.

2026년 4월, 《뉴욕타임스》는 한 연구자의 짧은 인터뷰를 실었습니다. 미국 코넬대학교 운영연구·정보공학과의 피터 프레이저⁠(Peter Frazier) 교수. 그는 인공지능과 수학 모델로 해병대의 보급, 그중에서도 혈액 이송 문제를 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연구실에 한 통의 메시지가 도착하죠. 미 국방부가 모든 예산을 동결했다는 통보였습니다.

도대체 전장에서 피를 옮기는 일이 무엇이길래, 한 연구자의 일생을 걸 만한 가치가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 연구는 왜 갑자기 멈춰야 했을까요.

전장에서 부상자에게 1시간 안에 혈액을 전달하는 골든아워 도식

전장의 골든아워 도식. 부상 발생 시점부터 수혈까지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출혈성 쇼크에 의한 사망 위험이 가파르게 올라간다. 출처: Finch 편집부 자체 제작 일러스트

피는 왜 그렇게 옮기기 어려운가

혈액은 식료품보다 까다로운 보급품입니다. 적혈구를 담은 농축 적혈구는 1~6도 냉장 보관이 원칙이고, 전혈도 마찬가지죠. 신선동결혈장은 영하 20도 이하에서 1년 정도 견디지만, 한 번 녹이면 5일 안에 써야 합니다. 더 까다로운 건 수요예요. 부상자가 없는 날엔 한 팩도 필요 없다가, 폭발 사고 한 번에 수십 단위가 한꺼번에 필요해지죠.

그런데 인도태평양 지역처럼 거점이 함정인 환경에선 사정이 또 달라집니다. 본국에서 받아 오는 게 아니라 함정 안에서 군인들이 직접 헌혈해 피를 모아 두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를 워킹 블러드 뱅크라고 부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정맥에 보관된 피 말이죠. 누구의 혈액형이 어떤 함정에 얼마나 있는지를 실시간으로 파악하지 못하면, 정작 부상자가 생긴 함정에 호환되는 피가 한 봉지도 없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프레이저 교수 연구팀이 풀려 한 문제가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어느 함정·기지·전초기지에 어떤 종류의 피를 얼마나 비축할지를, 수요 예측과 부패 위험을 동시에 고려해 자동으로 추천하는 소프트웨어를 만든 거죠. 미 해군연구청의 약 120만 달러 규모 과제였습니다.

골든아워의 증거, 그리고 신선 전혈

그가 1시간이라는 시간에 집착한 데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습니다. 2009년 《J Trauma》에 발표된 미 육군 외상연구소 필립 스피넬라⁠(Philip C. Spinella) 박사 연구팀 논문이 그 출발점이죠. 이라크에서 중상을 입은 미군 전투원 354명을 분석했는데, 따뜻한 신선 전혈을 받은 그룹의 30일 생존율은 95%, 일반 성분수혈을 받은 그룹은 82%⁠였습니다. 신선 전혈의 사용량 자체가 생존율과 독립적으로 연관된다는 결과였죠.

이 발견은 그 뒤 10년에 걸쳐 미군의 수혈 교리를 바꿔놓습니다. 2020년 《Transfusion》에 실린 미군 합동외상시스템의 제니퍼 거니⁠(Jennifer Gurney) 박사 연구팀 논문은,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아프가니스탄 전방수술팀에서 다룬 환자 자료를 들여다봤어요. 결론은 비슷했죠. 가장 위중한 환자군에서, 신선 전혈을 받지 못한 쪽의 사망 위험이 신선 전혈을 받은 쪽의 약 2.8배에 달했습니다.

함정에서 부상자 발생 지점까지 혈액을 분배하는 보급 네트워크 도식

함정 기반 워킹 블러드 뱅크에서 전방 부상자까지 이어지는 혈액 보급 네트워크 도식. 어느 노드에 어떤 혈액형을 얼마나 비축할지가 수학적 의사결정 문제로 다뤄진다. 출처: Finch 편집부 자체 제작 일러스트

피 대신 가루를 들고 다닌다면

그렇다고 신선 전혈을 모두가 들고 다닐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대안이 등장했죠. 동결건조 혈장입니다. 액체 혈장에서 물을 빼고 가루로 만든 뒤, 필요할 때 멸균수에 섞어 다시 액체로 되돌려 쓰는 방식이죠.

2025년 《Transfusion》에 실린 미 해군 군의관 앤서니 푸사테리⁠(Anthony E. Pusateri) 박사 연구팀의 리뷰 논문은, 동결건조 혈장이 왜 군에 잘 맞는지를 정리했습니다. 상온에서 보관이 가능하고, 가볍고, 사용법이 간단하다는 것이죠. 옥타플라스LG 분말 같은 신형 제품은 17개국에서 승인됐고, 미국과 캐나다 군에선 응급용으로 쓸 수 있게 됐습니다. 멀고 험한 곳, 인프라가 무너진 지역에서 부상자를 살리는 데 결정적인 도구죠.

그래서 보급 문제는 단순히 피를 어디다 둘지의 차원을 넘어섭니다. 전혈, 농축 적혈구, 동결건조 혈장, 냉장 혈소판처럼 보관 조건이 제각각인 보급품을 어떤 비율로, 어느 노드에 둘지가 동시에 결정돼야 하죠. 프레이저 연구팀이 만든 의사결정 도구는 바로 이 다층적인 문제를 한꺼번에 푸는 시도였습니다.

2025년 4월, 멈춰버린 연구실

그러던 2025년 4월, 미 국방부에서 짧은 메시지 한 통이 옵니다. 자금 동결 통보였죠. 트럼프 행정부 출범 뒤 단행된 일련의 예산 삭감 흐름 중 하나였습니다. 프레이저 교수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린 해병대의 목숨을 살리려고 일하고 있었다. 왜 우리 연구비가 동결돼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던 석사과정생들은 졸업해 떠나갔고, 박사과정생을 새로 받을 돈이 없었습니다. 방위 산업체를 통해 우회 자금을 일부 받았지만 실전 투입을 위한 마지막 다듬기는 진행하지 못했죠. 가을이 돼서야 자금이 풀렸지만, 코넬에 실제로 돈이 들어온 건 2026년 1월. 그사이 1년 가까운 시간이 사라졌습니다.

그는 결국 혈액 이송 모듈을 잠시 접고, 식수와 식량, 탄약 같은 다른 보급품 쪽으로 연구 초점을 옮겨야 했어요. 잃어버린 시간 동안 만들 수 있었던 도구는, 만들어지지 못한 채 사라졌습니다.

미 공군 의무 부대 소속 병사가 수혈 술기를 훈련하는 모습

2025년 6월, 독일 란트슈툴 지역의료센터에서 전술전투부상자처치 훈련 중 수혈 술기를 시연하는 미 공군 주방위군 의무병.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 U.S. Air National Guard, Staff Sgt. Olivia Monk

한 사람의 연구가 멎으면, 누군가의 한 시간이 짧아진다

피를 옮기는 일이 평범해 보일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이 평범한 일을 누가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누군가의 골든아워는 더 길어지기도, 더 짧아지기도 합니다. 프레이저 교수의 인터뷰가 마음에 남는 건, 그가 만든 도구의 화려함이 아니라 그 도구를 만들지 못하게 된 1년이 지나간 자리에 무엇이 남는가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죠.

그는 마지막에 이렇게 정리합니다. "이 소프트웨어가 있었다면 누군가의 생존 확률이 더 높았을 것이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 결국 누군가의 목숨이 걸린 문제다."

먼 곳에서 누군가의 책상이 비워지는 일은, 다른 먼 곳에서 누군가의 1시간이 짧아지는 일로 이어집니다. 과학의 가장 무서운 점은, 그 인과가 너무 길고 조용해서 정작 그 시간이 짧아진 사람조차 끝내 알아채지 못한다는 사실일지도 모르고요.

참고문헌

1. Spinella, P. C., Perkins, J. G., Grathwohl, K. W., Beekley, A. C., & Holcomb, J. B. (2009). "Warm fresh whole blood is independently associated with improved survival for patients with combat-related traumatic injuries." The Journal of Trauma, 66(4 Suppl), S69-S76. DOI: 10.1097/TA.0b013e31819d85fb

 2. Gurney, J., Staudt, A., Cap, A., Shackelford, S., Mann-Salinas, E., Le, T., Nessen, S., & Spinella, P. (2020). "Improved survival in critically injured combat casualties treated with fresh whole blood by forward surgical teams in Afghanistan." Transfusion, 60(S3), S180-S188. DOI: 10.1111/trf.15767

 3. Pusateri, A. E., Kishman, A. J., Ariffin, M. A. B., Watts, S., Kirkman, E., Weiskopf, R. B., O'Brien, B. S., Snyder, S. J., Cardin, S., Hollis, E. M., & Hegener, O. (2025). "Potential military applications for a new freeze-dried plasma." Transfusion, 65(S1), S240-S249. DOI: 10.1111/trf.18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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