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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만다린덕. 이빨 없는 부리, 물가에서 찾을 수 있는 먹이, 빠른 성장 — K-Pg 경계를 건넌 새 계통이 물려준 세 장의 생존 티켓이 그대로 담겨 있다. ⓒ Adrian Pingstone /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지금으로부터 6,600만 년 전, 지름 10km짜리 소행성이 지구에 떨어지던 날 공룡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그런데 사실 공룡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닙니다. 지금 창밖에서 지저귀는 참새, 동네 하천의 오리, 닭장 속 닭 — 이 모두가 살아남은 공룡의 직계 후손인 겁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중생대 말기 지구에는 수십 종의 새가 티라노사우루스 머리 위를 날아다녔습니다. 이빨 달린 원시형 조류, 긴 꼬리를 가진 고대 새,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현대형 조류까지. 그런데 소행성이 떨어진 뒤 살아남은 건 지극히 일부였습니다. 새 전체의 90% 이상이 공룡과 함께 통째로 사라졌거든요. 그럼에도 어떻게든 살아남은 그룹이 있었습니다. 바로 오리와 닭, 그리고 그 친척들, 즉 '현대 조류'라고 부를 수 있는 그룹 하나뿐이었습니다.
왜 하필 그들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최근 몇 년 사이 고생물학자들이 내놓은 답은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그들은 '씨앗을 깰 수 있는 부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먼저 짚어둬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대멸종은 '공룡은 멸종하고 새는 살아남았다' 같은 깔끔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실제로는 새들도 함께 대거 멸종했습니다. 한 추산에 따르면 당시 살아있던 새 종의 90% 이상이 소행성 충돌 이후 사라졌습니다.
중생대 말기 새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빨과 긴 뼈 꼬리, 발톱을 그대로 달고 있던 '원시형 조류'입니다. 특히 엔안티오르니테스(enantiornithes)라고 부르는 그룹은 지구 전역의 숲 캐노피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나뭇가지 위에서 둥지를 틀고 곤충과 식물을 먹으면서 살아가던 이들은, 당시 새들 중 가장 흔한 부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빨 없이 부리를 가진 '크라운 그룹' 조류입니다. 현재 살아있는 모든 조류의 공통 조상 계통인데요, 중생대 끝자락에는 아직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고생물학자들은 대멸종 순간을 기록한 '이리듐 층'을 기준으로 지층을 들여다봅니다. 충돌한 소행성이 뿌린 희귀 금속이 전 지구에 얇게 깔려 만든 이 지층은, 백악기와 신생대를 가르는 K-Pg 경계로도 불립니다. 북미 뉴멕시코, 몬태나, 캐나다 서스캐처원 일대를 조사하면 이 층 아래쪽에서 열 종 이상의 새 화석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얇은 층을 건너 위로 올라가는 순간 그림이 바뀝니다. 이빨 달린 새도, 긴 꼬리 새도, 갈고리 발톱 새도 더는 나오지 않는 거죠. 남은 건 오로지 크라운 그룹뿐이었습니다. 2018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대니얼 필드(Daniel J. Field) 연구팀이 정리한 결론도 같았습니다. K-Pg 경계를 넘어 살아남은 새는 단 한 계통, 현대 조류의 직계 조상뿐입니다.
이쯤 되면 질문이 바뀌어야 하죠. "왜 새만 살아남았나"가 아니라, "새들 중에서도 왜 오직 이 한 그룹만 살아남았나"로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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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된 Protopteryx 화석. 중생대 말기 숲을 지배했던 ‘엔안티오르니테스’ 계통의 대표로, 이빨과 발톱 달린 날개를 그대로 간직한 원시형 조류다. K-Pg 경계를 건너지 못했다. ⓒ Jonathan Chen /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살아남은 새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중 첫 번째는 '어디서 살고 있었는가'입니다.
소행성이 직격한 뒤 지구에서 가장 크게 망가진 환경은 숲이었습니다.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떨어진 충격파가 직경 수천 km에 걸친 숲을 쓸어버렸고, 지구 반대편까지 번진 산불과 산성비가 나머지를 마무리했거든요. 대기 중에 퍼진 먼지와 그을음이 햇빛을 가리면서 몇 년간 이어지는 '충돌 겨울'이 시작된 거죠. 이때는 살아남은 나무들도 광합성을 못 해 서서히 굶어 죽어갔습니다.
이 시점의 지층에서는 곰팡이 포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균류 급증(fungal spike)' 현상이 관찰됩니다. 숲 전체가 한꺼번에 쓰러져 썩고 있다는 뜻입니다. 숲이 원래 모습을 되찾기까지는 수백 년이 걸렸습니다.
숲을 삶의 무대로 삼던 생물들에게는 재앙이었습니다. 앞서 나온 엔안티오르니테스는 전형적인 나무 위 서식자였거든요. 둥지도 먹이도 은신처도 전부 나무에 걸려 있었는데, 그 나무가 통째로 사라졌으니 살아남을 길이 거의 없었던 겁니다. 반면 당시 소수파였던 크라운 그룹의 조상들은 주로 물가와 지상에 머물렀습니다. 2020년 필드 연구팀이 벨기에·네덜란드 국경의 석회암 채석장에서 찾아낸 Asteriornis maastrichtensis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원더치킨'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 새는 오리·닭 계통에 속하는 가장 오래된 화석인데, 열대 해안의 얕은 물가에서 살던 새였습니다. 1990년대에 남극에서 발견된 Vegavis iaai도 비슷한 습지형 조류였습니다.
숲이 무너져도 물가와 지상은 상대적으로 버틸 수 있었습니다. 강이나 호수는 급격한 환경 변화에 비교적 완충 역할을 해주거든요. 운 좋게 그 환경에 적응해 있던 조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거주지 운빨' 덕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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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g 경계 지층. 중생대(아래)와 신생대(위)를 가르는 얇은 하얀 점토층 안에 소행성 충돌 당시 전 지구에 퇴적된 이리듐 층이 들어 있다. 화석 기록이 이 선 하나를 건너면서 극적으로 바뀐다. ⓒ Mike Beauregard / Wikimedia Commons (CC BY 2.0)
두 번째 조건은 '무엇을 먹을 수 있었는가'입니다. 그리고 이쪽이 사실 더 중요했습니다.
충돌 이후 지구 생태계는 도미노처럼 무너졌습니다. 광합성이 멈추면서 식물이 죽고, 식물을 먹던 초식동물이 죽고, 그 초식동물을 먹던 육식동물까지 줄줄이 따라 죽었죠. 뿌리·잎·줄기·열매처럼 '자라고 있는' 식물 조직을 먹던 생물은 가장 빠르게 굶주렸어요. 딱 하나 예외가 있었는데요. 바로 씨앗이었습니다.
씨앗은 원래부터 긴 휴면을 버티도록 진화한 구조물입니다. 현대 생태학에서 산불이나 화산 분화 뒤 생태계 회복을 이끄는 주인공도 토양 속에 묻혀 있던 씨앗 은행(seed bank)입니다. 어떤 씨앗은 수십 년, 때로는 100년 넘게도 발아 능력을 유지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생태계가 폭삭 무너져도 지표 바로 아래에는 '먹을 것'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셈이죠.
문제는 씨앗을 먹을 수 있는 입을 가진 동물이 많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씨앗은 겉껍질이 단단해서 이빨로 씹기보다는 단단한 부리로 '깨는' 쪽이 훨씬 효율적입니다.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데릭 라슨(Derek Larson) 연구팀이 2016년에 발표한 결과를 보면, 대멸종 직전까지 새·조류형 공룡의 이빨 형태는 수백만 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빨 달린 새는 주로 곤충과 작은 동물, 일부 식물을 먹는 쪽으로 고정돼 있었다는 뜻이죠. 반면 이빨이 없고 부리만 있는 새는 이 시기에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부리는 단단한 씨앗을 깨는 데 특화된 구조였어요.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소행성이 떨어지고 숲이 사라진 몇 년 동안, 지구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식량은 토양 속 씨앗이었습니다. 그 씨앗을 깰 수 있던 새는 딱 한 계통 — 바로 부리 달린 크라운 그룹이었습니다. 이빨 달린 고대 조류는 눈앞에 씨앗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그걸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단순해 보이는 차이지만, 종이 멸종하느냐 살아남느냐는 결국 여기서 갈렸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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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teriornis maastrichtensis의 두개골. 왼쪽은 6,670만 년 전 벨기에 지층에서 나온 실제 화석을 3D 프린팅한 모델, 오른쪽은 고해상도 CT 스캔으로 내부까지 복원한 모습이다. 이빨이 사라진 자리에 씨앗을 다룰 수 있는 단단한 부리가 또렷이 남아 있다. ⓒ Field et al. (2020) / Wikimedia Commons (CC BY 4.0)
남은 조건 하나는 '얼마나 빨리 자랐는가'입니다. 작고 빠르게 자라는 생물이 훨씬 유리했습니다.
뼈 단면에는 나이테 같은 성장선이 남습니다. Vegavis의 뼈를 잘라본 연구자들은 놀라운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성장선이 거의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태어난 해 안에 완전 성체가 됐다는 뜻입니다. 비슷하게 Asteriornis도 빠르게 성장하는 생활사를 가진 걸로 보입니다. 반면 중생대 말기까지 함께 살던 고대 조류는 성장선이 여러 겹 보이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몇 년에 걸쳐 천천히 자라야 어른이 됐던 거죠.
몇 년 이어진 '충돌 겨울'에서는 천천히 자라는 게 치명적이었습니다. 개체가 성숙해서 알을 낳기도 전에 굶어 죽을 가능성이 컸거든요. 반대로 한 해 안에 어른이 돼서 번식을 시작할 수 있다면, 개체군은 재난 한복판에서도 세대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몸집도 같은 논리입니다. 당시 대멸종을 관찰해보면 뚜렷한 규칙이 하나 보입니다. 시베리안 허스키(약 25kg) 정도보다 큰 육상 동물은 예외 없이 멸종했습니다. 큰 몸집은 평소에는 유리하지만, 먹이가 바닥난 상황에서는 감당이 안 됩니다. 하루에 필요한 칼로리가 너무 높거든요. Vegavis나 Asteriornis가 오리만 한 크기였던 건 그래서 결정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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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teriornis 대퇴골의 조직 단면. 뼈 안쪽 얇은 층(ICL)은 성장이 거의 멈춘 뒤 쌓인 치밀 층을 뜻한다. 바깥쪽 골조직에 해마다 생기는 ‘성장선’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 태어난 해 안에 이미 성체 크기에 도달했다는 증거다. ⓒ Field et al. (2020) / Wikimedia Commons (CC BY 4.0)
정리해보면 대멸종을 통과한 새들은 세 장의 생존 티켓을 들고 있었습니다. 물가나 지상에 살고 있었고, 단단한 부리로 씨앗을 깰 수 있었고, 1년 안에 다 자라는 빠른 생활사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세 가지를 동시에 가진 계통은 중생대 말 전체 새 중 일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소수가 살아남은 뒤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소행성 충돌 이후 몇백만 년 안에 현대 조류는 믿기 어려운 속도로 분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뉴멕시코에서 발견된 Tsidiiyazhi abini는 대표적인 증거입니다. 2017년 미국 자연사박물관의 대니얼 케스카(Daniel Ksepka), 토머스 스티덤(Thomas Stidham), 토머스 윌리엄슨(Thomas Williamson) 연구팀이 명명한 이 새는 대멸종 뒤 약 600만 년 만에 살던 작은 새로, 놀랍게도 현존하는 쥐새류(mousebird)에 해당하는 계통이었습니다. 현재 쥐새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여섯 종 정도만 남아있지만, 당시에는 이미 북미 정글에서 나뭇가지를 쥐고 다녔던 셈이죠.
쥐새가 그 시점에 있었다는 건 단순한 사실 하나가 아닙니다. 조류 계통도에서 쥐새는 상당히 파생된 가지에 속하거든요. 그 가지가 이미 분화했다는 건, 더 원시적인 여러 다른 가지들 — 오리와 닭, 매와 독수리, 비둘기와 올빼미, 홍학까지 — 이 이미 각자의 길을 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 그림은 2024년 덴마크 코펜하겐 대학의 요세핀 스틸러(Josefin Stiller) 연구팀이 363종 조류의 전장 유전체를 분석해 내놓은 결과와 맞아떨어집니다. 현대 조류의 주요 계통 대부분이 K-Pg 경계를 지나 수백만 년 안에 폭발적으로 분화한 흔적이 유전체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오늘날 지구에는 1만 종 넘는 새가 살고 있는데, 이는 포유류 종 수의 약 두 배에 해당합니다. 그 방대한 다양성의 출발점이 바로 씨앗을 깰 줄 알던 소수의 부리 달린 새들이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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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ygostylia(꼬리뼈 융합 조류) 계통수. 이빨 달린 Janavis 같은 고대 조류(왼쪽)와 현대 조류 계통 Ornithurae·Neornithes(오른쪽)의 관계를 보여준다. K-Pg 대멸종을 건넌 건 다이어그램 오른쪽 끝 — 오리·기러기·닭으로 이어지는 크라운 그룹 하나뿐이었다. ⓒ Field et al. (2024) / Wikimedia Commons (CC BY 4.0)
대멸종은 흔히 '적자생존'의 대표적인 사례로 불리지만, 사실 이때 작동한 원리는 정반대에 가깝습니다. '적자'가 살아남은 게 아니라, '마침 준비돼 있던 존재'가 살아남았거든요.
오리의 조상이 딱딱한 부리를 진화시킨 건 다가올 대멸종에 대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물가에서 씨앗을 먹기 편해서, 그 형태가 유리해서 진화시켰을 뿐입니다. 빠른 성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짧은 생의 주기 안에서 한 해라도 빨리 번식하는 쪽이 살아남는 데 유리했을 뿐이에요. 그 모든 습성이 6,600만 년 전 어느 봄날, 우연히 대멸종의 체크리스트와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것뿐입니다.
오늘 우리 집 처마 밑에서 우는 참새가 공룡의 마지막 후손인 이유는, 결국 그 새의 먼 조상 하나가 우연히 단단한 씨앗을 깰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진화는 미래를 볼 수 없습니다. 그저 오래전 어떤 습성이 훗날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쓸모를 발휘했다는 사실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 한 장의 티켓이 없었다면, 지금 이 지구에는 새소리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1. Field, D. J., Bercovici, A., Berv, J. S., Dunn, R., Fastovsky, D. E., Lyson, T. R., Vajda, V., & Gauthier, J. A., "Early Evolution of Modern Birds Structured by Global Forest Collapse at the End-Cretaceous Mass Extinction", Current Biology, 2018. doi:10.1016/j.cub.2018.04.062
2. Field, D. J., Benito, J., Chen, A., Jagt, J. W. M., & Ksepka, D. T., "Late Cretaceous neornithine from Europe illuminates the origins of crown birds", Nature, 2020. doi:10.1038/s41586-020-2096-0
3. Larson, D. W., Brown, C. M., & Evans, D. C., "Dental Disparity and Ecological Stability in Bird-like Dinosaurs prior to the End-Cretaceous Mass Extinction", Current Biology, 2016. doi:10.1016/j.cub.2016.03.039
4. Ksepka, D. T., Stidham, T. A., & Williamson, T. E., "Early Paleocene landbird supports rapid phylogenetic and morphological diversification of crown birds after the K-Pg mass extinction", PNAS, 2017. doi:10.1073/pnas.1700188114
5. Stiller, J., Feng, S., Chowdhury, A. A., et al., "Complexity of avian evolution revealed by family-level genomes", Nature, 2024. doi:10.1038/s41586-024-07323-1
6. Brusatte, S., "How Birds Survived the Dinosaurs' Doomsday", Scientific American, Vol. 334 No. 5, May 2026, p.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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