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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오호츠크해 서쪽 연안에서 점프하는 보우헤드 고래(Balaena mysticetus). 이들은 지구에서 가장 오래 사는 포유류로 알려져 있습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 Olga Shpak, Marine Mammal Council, IEE RAS
1990년대 알래스카 바다에서 잡힌 보우헤드 고래 한 마리의 지방층에서 이상한 게 발견됐습니다. 1800년대 중반에 쓰이던 옛 작살촉이 박혀 있었던 거죠. 그 고래는 적어도 150년 전부터 그 작살촉을 지방에 품은 채 북극해를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알래스카 이누피아트(Inupiat) 사냥꾼들 사이에서는 "보우헤드 고래는 사람 두 번의 인생을 산다"는 말이 1,000년 가까이 전해 내려왔는데요. 과학자들이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결정적 증거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동물은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오래 사는 걸까요? 게다가 88톤이나 되는 몸, 쓰레기 수거 트럭 세 대 무게의 살덩이를 가지고도 왜 암에 걸려 일찍 죽지 않을까요?
이 의문에 정면으로 부딪힌 사람들이 미국 로체스터대학교의 베라 고르부노바(Vera Gorbunova) 박사와 안드레이 셀루아노프(Andrei Seluanov) 박사 부부입니다. 두 사람은 박쥐, 비버, 벌거숭이두더지쥐처럼 오래 사는 포유류만 골라 연구하는 노화 생물학자죠. 보우헤드 고래는 그들에게 가장 풀고 싶은 수수께끼였습니다.
먼저 눈여겨봐야 할 사실이 하나 있어요. 분자 손상이 쌓이는 속도로 거꾸로 추적해 보면, 보우헤드 고래의 수명은 무려 약 268년까지 늘어난다는 추정이 나옵니다. 코끼리도 70년 남짓이고, 인간 최장수 기록도 122년인데 말이죠. 게다가 보우헤드 고래는 1년 내내 북극 바다를 떠나지 않는 유일한 고래이기도 합니다. 영하의 차가운 물속을 평생 헤엄치죠.
덩치가 크면 암에 잘 걸리는 게 보통입니다. 세포 분열 횟수가 많아질수록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도 함께 올라가니까요. 2015년 연구진은 코끼리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알아냈습니다. 코끼리는 암 억제 유전자인 p53을 사람보다 훨씬 많은 사본으로 가지고 있었어요. 위험 신호가 뜨면 그 세포가 알아서 자살하도록 만드는 전략입니다.
고르부노바 박사 연구팀은 보우헤드 고래도 같은 방식일까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살아 있는 보우헤드 세포를 손에 넣는 일부터 만만치 않았죠. 알래스카 북부 노스슬로프 지역의 이누피아트 사냥꾼들이 식량으로 잡은 고래에서 조직 일부를 받아 와야 하는데, 얼리면 세포가 죽어버립니다. 결국 학생들이 직접 알래스카로 날아가 사냥선에서 갓 채취한 피부와 폐 조직을 아이스박스에 담아 비행기로 들고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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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차가운 바닷속에서 보우헤드 고래 세포가 CIRBP 단백질을 대량 생산하는 모습과, 그 단백질이 부서진 DNA 가닥을 다시 정확하게 꿰매주는 과정. ⓒ The Finch
실험실에서 자란 보우헤드 세포에 자외선을 쏘아 DNA를 일부러 끊어보았는데요. 결과는 의외였습니다. 보우헤드 세포는 코끼리처럼 자살하지 않았어요. 대신 끊어진 DNA를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그리고 다른 어떤 종보다 정확하게 다시 이어 붙였습니다. 흉터 없이 깔끔하게 꿰매는 셈이죠. 손상이 쌓일 틈을 아예 주지 않는 전략입니다.
그렇다면 이 정밀 수선공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연구팀이 추격 끝에 찾아낸 주인공은 CIRBP(Cold-Inducible RNA-Binding Protein)라는 단백질이었습니다. 한국어로 옮기면 "저온 유도성 RNA 결합 단백질"인데요. 원래는 추위에 노출된 세포가 단백질 합성을 빠르게 돌리고, 한기로 망가지지 않게 보호하는 일을 합니다. 즉, 본래 임무는 "추위 방어"였어요.
그런데 고르부노바 박사 연구팀이 자세히 들여다보니, 보우헤드 고래 세포는 CIRBP를 어마어마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단백질들이 DNA 가닥 주위에 잔뜩 몰려 있는 모습이 관찰됐죠. 2018년에 한 연구가 "CIRBP가 DNA 수선에도 관여할지 모른다"고 살짝 건드린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 그게 사실로 드러난 겁니다.
결정적 실험은 다음이었습니다. 보우헤드 고래의 CIRBP 유전자를 사람 세포에 집어넣었더니, 그 세포의 DNA 수선 속도가 두 배로 뛰었어요. 초파리 실험에서는 보우헤드 CIRBP 유전자를 받은 초파리가 일반 초파리보다 더 오래 살았습니다. 이 결과들은 2025년 《네이처》에 발표된 고르부노바 연구팀의 논문으로 정리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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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북극 추위에 적응하려고 발달한 CIRBP가 부수적으로 DNA 수선 능력을 끌어올리면서, 결과적으로 암 저항성과 장수까지 함께 따라온 진화 경로. ⓒ The Finch
여기서 흥미로운 반전이 있어요. CIRBP는 원래 장수를 위해 진화한 유전자가 아니었습니다. 북극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기 위해 발달한 "추위 적응 도구"였죠. 그런데 그 도구가 부수 효과로 DNA를 정확히 꿰매는 능력까지 강화시켰고, 그 덕에 암이 줄고 수명이 늘어났다는 거예요. 진화가 추위 문제를 푸는 사이에 장수 문제까지 덤으로 풀어버린 셈입니다.
오래 사는 동물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벌어요. 벌거숭이두더지쥐는 30년 이상 사는데, 고르부노바 박사의 옛 제자인 마오즈용(Zhiyong Mao) 박사가 그 비밀을 풀었습니다. 현재 상하이 통지대학교에 재직 중인 그는 벌거숭이두더지쥐의 cGAS 유전자가 사람에게는 "감염 감지" 역할만 하는데, 두더지쥐에게는 DNA 수선 역할까지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죠. 종마다 다른 부품을 다른 용도로 다시 쓰며 노화에 맞서는 거예요.
이게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셀루아노프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유전자를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이미 우리 몸에 있는 시스템을 살짝 조정하기만 하면 된다는 거죠." 사람도 CIRBP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보우헤드 고래만큼 양을 많이 만들지도, 활발하게 쓰지도 못할 뿐이에요. 연구팀은 사람 CIRBP나 보우헤드 CIRBP를 더 많이 만들도록 조작한 생쥐를 이미 만들어 놨다고 합니다.
UC 버클리의 유전학자 피터 서드먼트(Peter Sudmant) 교수는 이 흐름이 "정말 빠르게 발전하는 흥미로운 분야"라고 평합니다. 그러면서 자연을 가리켜 "새로운 약과 치료법의 단서가 가득한 아름다운 실험실"이라고 표현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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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 얼음 가장자리를 향해 헤엄치는 보우헤드 고래. 영하의 바다에서 평생을 보내는 이 동물은 차가움이 곧 장수의 원동력이었습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 Vicki Beaver, NOAA Fisheries, Alaska Fisheries Science Center
물론 갈 길은 멉니다. 사람 세포가 CIRBP를 두 배 만들었다고 우리 수명이 두 배가 되지는 않을 거예요. 고르부노바 박사도 "실험용 생쥐들이 곧바로 죽지는 않았으니 적어도 당장 해롭지는 않다는 건 알아냈다"면서, "이제 정말 수명이 늘어나는지, 예상 못한 부작용은 없는지 측정 중"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200년 넘게 북극을 헤엄치는 고래 한 마리가 우리에게 보여준 건 단지 오래 사는 비결만이 아니에요. 어쩌면 노화라는 문제는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는 도구를 다시 깨우는 일일지 모른다는 힌트였죠. 차가운 바다에서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진 작은 단백질 하나가, 인류의 가장 오랜 숙제를 풀 열쇠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 참 놀랍지 않나요?
1. Firsanov, D., Zacher, M., Tian, X., Sformo, T. L., et al. (2025). "Evidence for improved DNA repair in the long-lived bowhead whale." Nature. DOI: 10.1038/s41586-025-09694-5
2. Keane, M., Semeiks, J., Webb, A. E., Li, Y. I., Quesada, V., et al. (2015). "Insights into the evolution of longevity from the bowhead whale genome." Cell Reports, 10(1), 112-122. DOI: 10.1016/j.celrep.2014.12.008
3. Tian, X., Firsanov, D., Zhang, Z., Cheng, Y., Luo, L., et al. (2024). "DNA repair and anti-cancer mechanisms in the long-lived bowhead whale." bioRxiv. DOI: 10.1101/2023.05.07.539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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