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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가뢰(Meloe proscarabaeus) 성체 암컷. 15~30mm짜리 묵직한 검푸른 딱정벌레다. 봄에 흙 속에 수천 개의 알을 낳고 사라지면, 갓 부화한 유충들이 꽃에 올라가 벌을 기다린다. ⓒ Igor Luzhanov /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식물이 아닌 동물이 식물의 향기를 똑같이 만들어낸다는 게 가능할까요? 2026년 1월 독일 막스플랑크 화학생태학 연구소의 알람·쾰너 팀이 bioRxiv에 올린 논문이 그 답을 내놓았습니다. 유럽 들판에서 흔히 보이는 가뢰(blister beetle)의 갓 부화한 유충이 꽃에서 나는 휘발성 향기 성분을 자기 몸에서 합성한다는 결과였죠.
이 발견이 흥미로운 이유는 단순히 "동물이 꽃 향기를 흉내 냈다"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유충이 만드는 분자가 식물에게서 가져온 게 아니라, 유충 자신의 효소—그것도 보통은 식물이 쓰는 종류의 효소—를 써서 처음부터 합성한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진화가 같은 화학적 답을 두 번, 그것도 동물과 식물이라는 멀리 떨어진 두 가지 길에서 찾아냈다는 뜻이거든요.
가뢰가 왜 이런 사기극을 진화시켰는지를 보려면 먼저 이 곤충의 기괴한 생활사를 알아야 합니다. 가뢰류(Meloidae)는 포유류로 치면 "한배에 수천 마리를 낳는" 부류죠. 유럽가뢰 암컷은 봄에 흙을 파고 들어가 한 번에 2,000~10,000개의 알을 낳고 죽거나 사라집니다. 알 하나하나는 아주 작고, 부화한 유충도 1mm가 채 되지 않죠.
그런데 이 유충은 자기 힘으로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가뢰의 진짜 먹이는 솔리태리비(solitary bee)—혼자 사는 단독 생활성 벌—의 둥지 안에 있는 꿀과 알입니다. 흙 속에서 부화한 1mm짜리 애벌레가 그 둥지까지 자기 다리로 걸어가는 건 불가능에 가깝죠. 그래서 가뢰 유충은 한 가지 전략을 진화시켰습니다. 꽃에 올라가서 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그 등에 올라타는 겁니다(이런 이동 방식을 학술적으로 포레시(phoresy)라고 부릅니다).
문제는 이 작은 유충에게는 "벌을 부르는 능력"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다음 단계의 트릭이 등장합니다. 유충 수백 마리가 꽃 줄기 끝에 빼곡히 모여 노란-주황색 덩어리를 만든 다음, 화학물질을 합성해 공기 중으로 뿌리는 거죠. 이 화학물질이 무엇인지가 이번 연구의 본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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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을 낳고 있는 가뢰(Meloe violaceus). 흙을 파고 들어가 한 번에 수천 개의 알을 낳는 이 다산성은 가뢰류 전반의 특징이다. 갓 부화한 유충 가운데 결국 벌의 둥지에 도달해 살아남는 개체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 Giles Watson / Wikimedia Commons (CC BY-SA 2.0)
알람·쾰너 팀은 유충 덩어리가 뿜는 휘발성 유기화합물을 가스 크로마토그래피-질량분석기로 분리해 17가지 분자를 동정했습니다. 그리고 그중 핵심 성분이 바로 (S)-리나로올(linalool)이라는 모노테르페노이드 계열 분자였습니다.
리나로올이라는 이름이 낯설어도 사실 우리 코는 잘 알고 있습니다. 라벤더의 그 익숙한 향, 베르가못 오렌지의 시트러스 향, 백합과 라일락의 달콤한 향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분자가 리나로올이니까요. 향수 산업에서 가장 흔하게 쓰이는 식물 유래 분자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리나로올은 "꽃 냄새의 표준 부품"이라고 할 만한 화합물입니다.
유충 덩어리에서 나온 17가지 화합물 중 나머지는 리나로올이 산화되어 만들어지는 유도체들이었습니다. 리나로올 산화물(linalool oxide), 푸라노이드 형태, 알코올기가 한 번 더 가공된 형태 같은 것들이죠. 즉 17가지 분자가 따로따로 합성된 게 아니라, 리나로올이라는 출발 물질을 가뢰 유충이 한 단계씩 변형해 만들어낸 "리나로올 가족 사진"이었던 셈입니다.
연구팀이 이 화합물 칵테일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야외에 두자, 단독 생활성 벌이 실제로 와서 앉으려는 행동을 보였습니다. 유충 없이 향만으로도 속는다는 게 행동실험으로 확인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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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나로올(linalool)의 분자 구조. 탄소 10개로 이루어진 모노테르페놀 계열 알코올로, 라벤더·라일락·베르가못 등 수많은 꽃에서 나는 향기의 핵심 부품이다. 가뢰 유충은 이 분자를 기반으로 17가지 휘발성 화합물 칵테일을 합성한다. ⓒ Edgar181 /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여기서부터가 진짜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가뢰 유충이 리나로올을 어디서 가져오는 걸까요. 가능성은 둘입니다. 첫째, 식물에서 따다 쓴다(즉 꽃에 앉을 때 묻혀 온다). 둘째, 자기 몸에서 만든다.
연구팀은 두 번째 가능성을 검증하기 위해 유충의 RNA를 모두 시퀀싱해 발현 중인 유전자 목록을 뽑았습니다. 그 가운데 시토크롬 P450(cytochrome P450)이라는 효소군에 속하는 유전자 여러 개가 유난히 많이 발현되고 있었죠. P450은 산화 반응을 담당하는 거대한 효소 패밀리로, 대부분의 생물에 존재하지만 식물에서 특히 꽃 향기 같은 휘발성 분자를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연구팀은 이 P450 효소들을 시험관에서 따로 발현시켜 (S)-리나로올을 기질로 넣어 봤습니다. 결과는 분명했죠. 효소가 리나로올을 산화해 유충 향기에서 발견된 그 산화 유도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즉 가뢰 유충은 식물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몸의 효소만으로 꽃 향기를 합성할 수 있다는 게 확인됐습니다.
이건 진화적으로 꽤 이상한 일입니다. 보통 동물이 식물 분자를 흉내 낼 때는 식물에서 따 온 분자를 그대로 자기 몸에 쌓아두는 경우가 많거든요(예: 모나크 나비가 박주가리 독을 저장하는 식). 그런데 가뢰 유충은 식물 효소와 비슷한 산화 효소를 자기 몸에 갖추고,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만들어냅니다. 식물의 향기 화학을 동물이 독립적으로 재현해 낸 사례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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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토크롬 P450 효소(P450 2A6, PDB 1z10) 단백질 구조. 가뢰 유충이 발현하는 P450 효소들은 리나로올의 특정 위치에 산소를 붙여 17가지 향기 분자 칵테일을 만들어낸다. P450은 식물의 꽃 향기 생합성 경로의 핵심 효소이기도 한데, 동물이 같은 분자에 대해 같은 종류의 효소를 진화시킨 점이 이번 발견의 화학생태학적 의의다. ⓒ Emw /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가뢰류의 화학적 사기극은 사실 처음 보고되는 게 아닙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모하비 사막에 사는 같은 속의 또 다른 종, 멜로에 프란치스카누스(Meloe franciscanus)는 다른 방식으로 같은 일을 합니다.
2006년 새울-거셴츠와 밀러가 PNAS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M. franciscanus 유충 덩어리가 뿜는 화학물질은 꽃 향기가 아니라 모래굴벌(Habropoda pallida)의 암컷 성페로몬을 흉내 낸 분자였습니다. 즉 이 종의 유충은 "꽃이 있다"가 아니라 "암컷이 있다"는 신호로 수컷 벌을 유인합니다. 속아 접근한 수컷이 가짜 짝짓기를 시도하는 순간 유충들이 등에 옮겨 타고, 수컷이 진짜 암컷과 만났을 때 다시 옮겨 타서 결국 암컷의 둥지까지 도달하죠.
여기에 더해 2018년 같은 연구팀이 다시 PNAS에 보고한 결과는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M. franciscanus의 분포역이 모하비 사막과 오리건 해안 사구로 갈라져 있고, 두 지역에서 숙주가 되는 모래굴벌 종도 다릅니다. 그런데 이 두 지역의 가뢰 유충이 만드는 페로몬 모방 신호의 화학 조성이, 각각 그 지역의 숙주 벌 종에 정확히 맞춰 달라져 있다는 거죠. 같은 종 안에서도 사기 신호가 지역별로 진화하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요약하면 같은 가뢰속(Meloe) 안에서 유럽가뢰는 "꽃을 흉내 내는" 길을, 북미의 사촌은 "암컷 벌을 흉내 내는" 길을 택했습니다. 둘 다 결국 벌의 등에 올라타기 위한 것이지만, 화학적 표적이 다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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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산 가뢰 Meloe franciscanus의 생활사 도식. 알 → 유충 덩어리 형성 → 수컷 벌 등에 옮겨 탐 → 짝짓기 시 암컷 벌로 이동 → 둥지에서 알·꿀 섭식. 유럽가뢰가 꽃 향기로 벌을 부르는 데 비해, 이 종은 암컷 벌의 성페로몬을 흉내 내 수컷을 부른다. ⓒ Laura P. Zarcos /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화학생태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 중에 "케미컬 모방(chemical mimicry)"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어떤 생물이 다른 생물의 화학 신호를 흉내 내서 이득을 얻는 현상을 가리키는데요. 보통은 양쪽 다 같은 화학물질을 만드는 데 필요한 효소 유전자가 진화 어딘가에서 공유되거나 흘러 들어왔다는 식의 설명이 따라붙습니다.
가뢰 유충의 P450 효소는 식물 P450과 기능이 비슷해 보이지만, 두 효소군은 사실 곤충과 식물이 갈라진 5억 년 전쯤부터 별도로 진화해 온 다른 패밀리입니다. 같은 종류의 산화 반응을, 같은 종류의 분자에 대해, 별개의 진화 경로에서 독립적으로 갖추게 된 셈이죠. 이걸 수렴 진화(convergent evolution)라고 부릅니다.
이번 발견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 수렴이 "형태"가 아니라 "분자"의 차원에서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새와 박쥐가 둘 다 날개를 가지고 있는 식의 형태적 수렴은 잘 알려져 있지만, 식물의 향기 화학을 동물이 같은 분자 단위까지 똑같이 재현해 내는 사례는 드뭅니다. 가뢰 유충은 진화가 화학 수준에서도 같은 답을 찾아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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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나(Andrena nigroaenea) 벌의 등에 옮겨 탄 가뢰(Meloe violaceus) 유충. 1mm 남짓한 이 작은 애벌레들이 결국 도달하려는 곳은 벌의 둥지 속 알과 꿀이다. 사진 한 장 안에 가뢰류의 진화 전략 전체—다산, 화학 사기, 포레시, 둥지 기생—가 압축되어 있다. ⓒ Janet Graham / Wikimedia Commons (CC BY 2.0)
이 작은 애벌레가 보여주는 건, 결국 자연이 어떤 신호를 "절대적인 신호"로 정해두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꽃 향기는 식물이 만드는 게 정상이지만, 그 분자의 정체와 효과만 같다면 만든 주체가 동물이어도 받는 쪽은 똑같이 반응합니다. 신호의 의미는 받는 쪽이 결정하니까요.
벌의 코는 라벤더 향과 가뢰 향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둘 다 꽃 향기로 처리하죠. 그 빈틈을 가뢰 유충이 5억 년에 걸친 우회로—식물과 다른 별개의 P450 진화 경로—를 따라 정확히 찾아낸 셈입니다.
꽃이 아닌데 꽃 향기가 나는 주황색 덩어리. 그 정체는 사실 두 진화 경로가 같은 분자에 도달했다는 작은 증거였습니다.
1. Alam, R. M., Kessler, D., Vogel, H., Luck, K., David, A., Kunert, M., Kaltenpoth, M., O'Connor, S. E. & Köllner, T. G., "The floral illusion: A parasitic beetle mimics the scent of flowers to attract bees", bioRxiv, 2026. doi:10.64898/2026.01.15.699641
2. Saul-Gershenz, L. S. & Millar, J. G., "Phoretic nest parasites use sexual deception to obtain transport to their host's nest", PNAS, 2006. doi:10.1073/pnas.0603901103
3. Saul-Gershenz, L. S., Millar, J. G., McElfresh, J. S. & Rodriguez, R. L., "Deceptive signals and behaviors of a cleptoparasitic beetle show local adaptation to different host bee species", PNAS, 2018. doi:10.1073/pnas.1718682115
4. Bologna, M. A. & Pinto, J. D., "Phylogenetic studies of Meloidae (Coleoptera), with emphasis on the evolution of phoresy", Systematic Entomology,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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