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6월 7일, 눈 속에 묻힌 일곱 사람

1922년 6월 7일, 눈 속에 묻힌 일곱 사람

1922년 6월 7일, 에베레스트 북쪽 사면입니다. 해발 7,300미터. 영국 원정대의 세 번째 정상 도전 사흘째였죠. 선두에 선 유럽인 세 명 — 조지 맬러리, 하워드 서머벨, 콜린 크로퍼드 — 뒤로 열네 명의 셰르파 포터가 네 줄의 밧줄을 나눠 쥐고 눈을 밟고 올라가던 순간입니다. 그런데 선두 발밑에서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습니다. 설원이 유리판처럼 쪼개진 거죠. 며칠 사이 쌓인 새 눈이 깊은 크레바스를 얕게 덮고 있었던 겁니다.

맬러리와 앞의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피켈을 박고 버텨냈습니다. 바로 뒤의 포터 다섯 명도 비껴 서 살아남았죠. 그러나 뒤쪽 아홉 명은 달랐습니다. 무너진 눈덩어리와 함께 그대로 빙하 크레바스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겁니다. 동료들이 즉시 밧줄을 내려 두 명을 끌어올렸지만, 여섯 명은 얼음 속에서 숨졌고, 한 명의 시신은 끝내 수습되지 못했습니다. 일곱 사람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도르제, 라크파, 노르부, 파상, 페마, 상게, 템바. 모두 네팔 출신의 셰르파 포터죠. 훗날의 등반사 기록에서는 오래도록 "원주민 포터 7명 사망"이라는 한 줄로만 남은 이름들입니다.

이야기를 한 해 앞인 1921년 봄으로 돌려 보죠. 당시 세계 최고봉의 정상을 밟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에베레스트는 네팔과 티베트 사이에 솟아 있었지만, 네팔 왕국은 외국인 입국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산은 지도 위에만 존재할 뿐 접근조차 쉽지 않았던 거죠. 그 해 영국 왕립지리학회는 제13대 달라이 라마 투프텐 갸초로부터 티베트 쪽 접근 허가를 받아냅니다. 그 해 7월부터 9월까지, 찰스 하워드-버리 대령이 이끄는 정찰대가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북면을 지도에 옮겼죠. 그 정찰대의 일원으로 산을 가장 집요하게 들여다본 사람이 당시 서른다섯 살의 맬러리입니다.

1922년 본격적인 원정대가 인도 다르질링을 출발한 것은 3월 26일입니다. 대장은 인도군 출신의 찰스 브루스 장군이었고, 대원은 맬러리를 포함해 열세 명이었죠. 지금의 등반과는 모든 것이 달랐습니다. 보충 산소 장비는 막 시제품 단계였고, 동상 방지용 이중 부츠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일기예보라는 개념조차 현장에 도달하지 못했던 거죠. 대원들이 입었던 옷은 트위드 재킷과 양모 니트 스웨터, 그리고 개버딘 바지입니다. 오늘날 한겨울 스키장에서 봐도 가볍게 느껴질 차림이죠.

5월 22일, 첫 번째 정상 도전이 시작됐습니다. 맬러리·서머벨·헨리 모스헤드·에드워드 노턴 네 사람이 보충 산소 없이 올랐죠. 그날 그들은 해발 8,200미터에 도달합니다. 그때까지 인류가 지구 표면에서 올라가 본 가장 높은 지점이었던 겁니다. 그 자리에서 서머벨이 셔터를 누른 한 장의 사진은, 훗날 "역사상 가장 높은 곳에서 찍힌 사진"으로 공인됐습니다. 함께 올랐던 모스헤드는 극심한 동상을 입어 하산 중 손가락 끝을 여러 마디 잃었죠.

1922년 서머벨의 최고 고도 사진

1922년 5월 22일, 해발 8,200미터에서 T.H. 서머벨이 찍은 에베레스트 북봉과 갸충캉. 당시까지 인류가 찍은 가장 높은 곳의 사진이다. T.H. Somervell, Public Domain

닷새 뒤인 5월 27일, 두 번째 도전이 이어집니다. 이번엔 호주 출신의 등반가 조지 핀치가 실험적으로 보충 산소 장비를 착용하죠. 핀치·제프리 브루스, 그리고 셰르파 포터 테즈비르 부라가 함께 올랐습니다. 그들은 8,326미터까지 도달한 겁니다. 첫 도전보다 무려 126미터를 더 올라간 거죠. 핀치는 보충 산소가 고산 등반에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증명한 셈입니다. 다만 이 작은 성공이 대장 브루스 장군에게 잘못된 확신을 주고 말았죠. "한 번만 더 시도하면 정상이다"라는 확신입니다.

그래서 6월 7일의 세 번째 도전이 기획된 겁니다. 계절은 이미 몬순으로 접어들고 있었죠. 며칠 내내 많은 눈이 내렸고, 베테랑 셰르파들은 "눈이 아직 다져지지 않아 위험하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런데도 맬러리는 결정을 밀어붙였죠. 그는 북릉을 따라 빠르게 올라가는 직선 루트를 택합니다. 완만하게 우회하는 다른 길이 있었음에도 그 직선 루트를 고른 거죠. 그 한 번의 판단이 결국 일곱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셈입니다.

원정대는 1922년 8월 2일 다르질링으로 돌아왔습니다. 여덟 명의 유럽인 대원은 모두 살아서 귀환했죠. 그러나 일곱 명의 네팔인 이름은 대영제국의 신문 어디에도 크게 실리지 못한 겁니다. 영국 왕립지리학회의 공식 보고서에서도 그들은 "porters"라는 집합 명사로만 불렸습니다. 유족에게 전해진 보상금은 한 가족당 몇 주치 임금 정도였고, 장례를 위한 별도 의식도 치러지지 않았죠.

맬러리는 1924년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에베레스트에 돌아갑니다. 그해 6월 8일, 그는 앤드루 어빈과 함께 북동릉 상부 구름 속으로 사라지죠. 그가 정상에 먼저 닿았는지는 지금도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입니다. 맬러리의 시신은 1999년, 무려 75년 만에 해발 8,160미터 지점에서 발견됩니다. 그 순간 전 세계 신문은 그의 이름이 대서 특필됐죠.

그러나 크레바스에 묻힌 일곱 사람의 이름이 다시 알려지기까지는, 또 한 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2022년 영국산악회는 1922년 재난 100주년을 맞아서야 도르제·라크파·노르부·파상·페마·상게·템바의 이름을 공식 추모록에 올린 겁니다. 에베레스트 북면의 빙하 아래 어딘가에는 그 중 한 사람의 시신이 지금도 묻혀 있죠.

참고문헌

1. Mount Everest Committee, The Assault on Mount Everest, 1922, London: Edward Arnold & Co., 1923.

2. Davis, Wade. Into the Silence: The Great War, Mallory, and the Conquest of Everest. New York: Alfred A. Knopf, 2011.

3. Unsworth, Walt. Everest: The Mountaineering History, 3rd ed. Seattle: The Mountaineers Books, 2000.

4. Douglas, Ed. "A century on, Everest's first avalanche deaths remain a scar on mountaineering." The Guardian, 7 June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