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스튀스 쉬스테르만스가 1635년에 그린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초상. 재판이 끝나고 가택 연금 중이던 시기, 그는 이미 70대 노인이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 Justus Sustermans
지금으로부터 약 393년 전인 1633년 2월 13일, 한 노인이 마차에서 내려 로마 시내로 들어섰습니다. 나이 69세, 이가 빠지고 한쪽 눈은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였죠. 그는 휴양을 온 게 아니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종교재판소가 보낸 소환 명령서를 받고, 피렌체에서 약 280km를 노구를 이끌고 달려온 것이었습니다.
이 노인의 이름이 바로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을 처음 본 사람이자, 지동설을 주장한 죄로 법정에 선 그 갈릴레오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그는 왜 굳이 노년에 들어서야 법정에 서야 했을까요? 또, 정작 그를 무릎 꿇게 만든 결정적인 한 권의 책은 무엇이었을까요?
이야기는 16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갈릴레오는 자신이 직접 깎아 만든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죠. 그가 본 풍경은 충격적이었습니다. 태양 표면에는 검은 점(흑점)이 떠다녔고, 목성 주위에는 작은 위성 4개가 돌고 있었으며, 금성은 마치 달처럼 모양이 차고 기우는 위상 변화를 보였거든요.

피렌체 갈릴레오 박물관에 전시된 갈릴레오 자작 망원경 두 점. 1609~1610년경 제작된 것으로, 현존하는 갈릴레오의 망원경은 이 두 점뿐이다. 출처: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 Sailko
이 관측 사실들은 당시 교회가 떠받들던 아리스토텔레스 우주관과 정면충돌했습니다. 천상의 세계는 영원불변하고 완벽한 구체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교회의 공식 입장이었거든요. 그런데 태양에 점이 있고, 목성 같은 행성이 또 다른 천체를 거느리고 있다면? 모든 천체가 지구를 도는 게 아니라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셈이죠.
갈릴레오는 이내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가 약 한 세기 전에 내놓은 가설로 기울었습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태양 주위를 도는 평범한 행성 중 하나라는 그 가설 말이죠. 문제는 이게 단순한 천문학 논쟁이 아니었다는 데 있습니다. 케임브리지대학교 출판부에서 책을 낸 과학사학자 마크 와델 교수에 따르면, 코페르니쿠스의 우주관은 갈릴레오가 신학자들이 아닌 자신과 같은 자연철학자가 우주를 해석할 권리를 가진다고 주장하도록 만든 결정타였다고 합니다.
그 결과 1616년 2월, 종교재판소의 추기경들이 모여 코페르니쿠스의 책을 단죄하기로 결정합니다. 2월 26일엔 갈릴레오에게도 코페르니쿠스 학설을 옹호하거나 가르치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졌죠. 갈릴레오는 일단 한 발 물러섰습니다. 그런데 그를 둘러싼 분위기가 7년 뒤에 한 번 더 뒤집힙니다.
1623년, 새로 즉위한 교황 우르바누스 8세는 사실 갈릴레오의 오랜 팬이었습니다. 갈릴레오는 이를 신호로 받아들였죠. 토론 형식으로 양쪽 입장을 다 다루면 괜찮겠지, 라고 판단한 그는 1632년에 한 권의 책을 출판합니다. 이름하여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 세 인물이 천동설과 지동설을 두고 며칠에 걸쳐 토론을 벌이는 형식이었는데, 문제는 지동설을 지지하는 캐릭터가 너무 똑똑하고, 천동설을 옹호하는 캐릭터(이름이 심플리치오, 단순한 자라는 뜻)는 어딘가 어리석게 그려졌다는 점이었습니다.

조제프 니콜라 로베르 플뢰리(Joseph-Nicolas Robert-Fleury)가 1847년에 그린 작품, 종교재판소 앞에 선 갈릴레오. 실제 재판 200여 년 뒤에 그려진 상상화로, 19세기 유럽에서 갈릴레오 사건이 어떻게 기억됐는지를 보여 준다.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 Joseph-Nicolas Robert-Fleury
교황은 격분했고, 종교재판소는 곧장 책의 판매를 금지합니다. 그리고 1633년 2월, 늙고 병든 갈릴레오를 로마로 호출한 거죠.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UCLA)의 르네상스 연구자 헨리 켈리(Henry Ansgar Kelly) 교수가 2017년 학술지 처치 히스토리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사실 1633년의 절차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한 달짜리 재판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형식적인 본 재판은 1633년 5월 10일 단 하루였고, 그 앞뒤로 4월 12일의 첫 심문과 6월 22일의 판결 선고가 끼어 있는 구조였죠.
켈리 교수가 주목한 건 절차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종교재판소가 형식적으로는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가 정한 절차를 따랐지만, 실제로는 양심의 영역에 관한 기본 보호 장치를 일상적으로 위반했다고 분석했죠. 다시 말해 갈릴레오는 정식 기소 전에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사실상 강요받는 구조에 갇혀 있었던 거예요. 재판 결과, 그에게는 정식 이단보다는 한 단계 약한 이단의 강한 혐의(vehement suspicion of heresy)라는 죄목이 떨어집니다.

이탈리아 화가 크리스티아노 반티(Cristiano Banti)가 1857년에 그린 종교재판소를 마주한 갈릴레오. 무릎을 꿇은 채 판결을 듣는 노년의 갈릴레오를 묘사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 Cristiano Banti
1633년 6월 22일, 갈릴레오는 종교재판소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주장을 공식적으로 철회했습니다. 책은 금서 목록에 올랐고, 형벌은 가택 연금. 그는 피렌체 외곽 아르체트리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 갇혔고, 1642년 그곳에서 77세로 눈을 감습니다. 흥미로운 건 가택 연금 기간에도 그가 새로운 책 두 신과학에 관한 대화를 비밀리에 집필해 네덜란드에서 출판했다는 사실이죠. 늙어서도 손에서 펜을 놓지 않았던 셈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언제 자신들의 판결을 공식적으로 뒤집었을까요? 놀랍게도 무려 359년이 지난 1992년 10월 31일이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부터 13년간 진행된 조사 끝에, 갈릴레오를 재판한 신학자들이 잘못 판단했음을 공식 발표했죠. 영국 학술지 영국 과학사 저널 2010년 호에 실린 토머스 메이어(Thomas F. Mayer)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1616년의 명령서 자체에 대한 해석조차 학자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논쟁 중이라고 합니다. 무엇이 정확히 갈릴레오에게 금지됐는지를 두고 말이죠.
갈릴레오 사건은 흔히 과학과 종교의 충돌이라는 거대한 상징으로 기억됩니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더 복잡한 풍경이 펼쳐지죠. 망원경이 처음 보여준 흑점과 위성, 한때 그의 후원자였던 교황의 변심, 자신의 책을 옹호하는 인물을 너무 똑똑하게 그린 작가의 자존심, 그리고 절차의 사각지대에 갇힌 노인. 진실을 둘러싼 다툼은 한 번에 깔끔하게 끝나지 않습니다. 어떤 진실은 359년이 걸리고, 또 어떤 진실은 아직도 학자들의 책상 위에서 다시 쓰이고 있죠.
1. Kelly, H. A. (2016). "Galileo's Non-Trial (1616), Pre-Trial (1632-1633), and Trial (May 10, 1633): A Review of Procedure, Featuring Routine Violations of the Forum of Conscience" Church History. DOI: 10.1017/S0009640716001190
2. Mayer, T. F. (2010). "The Roman Inquisition's precept to Galileo (1616)" The British Journal for the History of Science. DOI: 10.1017/S00070874099900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