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전 로마 유리잔에 숨겨진 '브랜드 로고'

2,000년 전 로마 유리잔에 숨겨진 '브랜드 로고'

대영박물관이 소장한 4세기 리쿠르고스 컵. 뒤에서 빛을 비추면 붉게 변하는 후기 로마 시대의 대표적 케이지컵입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 Johnbod

두꺼운 유리 덩어리 하나를 깎아 만드는 데 꼬박 몇 년이 걸리는 술잔이 있습니다. 4세기 후기 로마 제국에서 만들어진 디아트레타⁠(diatreta), 일명 케이지컵⁠(cage cup)⁠이라 불리는 명품 유리잔이죠. 무게 수 kg짜리 통유리 블랭크의 80~90%⁠를 깎아내어, 안쪽 본체와 바깥쪽 그물 모양 두 층을 가느다란 유리 다리 수십 개로 이어 붙이는 극한의 공예품입니다.

현존하는 디아트레타는 전 세계 박물관을 통틀어 50점 안팎. 황제와 고위 귀족만 가질 수 있었던 사치품이었죠. 그런데 이 잔의 뒷면에 1,500년 동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비밀이 숨어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 유리잔 표면엔 무엇이 있었던 걸까요? 그리고 왜 1,500년 동안 아무도 그걸 알아보지 못한 거죠? 답은 의외로 평범한 습관 하나에서 시작됩니다.

4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쾰른 출토 디아트레타. 두꺼운 유리 한 덩이를 깎아 안쪽 잔과 바깥쪽 그물 두 층을 만들고, 가느다란 유리 다리로 이어 붙였습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 Formativ

이야기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시작됩니다. 워싱턴 주립대학교⁠(Washington State University) 미술사학과의 핼리 메러디스⁠(Hallie Meredith) 교수는 박물관 진열장 앞에 서 있었는데요. 그녀는 고고학자이자 유리공예가, 즉 직접 유리를 부는 메이커이기도 합니다.

메러디스 교수는 한 가지 직업병 같은 습관이 있었습니다. 무엇이든 손에 잡히면 일단 뒤집어 본다는 것이죠. 잔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바닥과 뒷면을 봐야 어떻게 제작됐는지 가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도 진열된 디아트레타 한 점을 빙 돌려보았는데, 거기서 이상한 무늬 몇 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십자, 잎사귀, 다이아몬드 모양의 작은 기호들이 비문 옆에 나란히 새겨져 있었습니다. 비문 자체는 평범한 인사말이었죠. 잔의 주인에게 장수를 기원하는 라틴어 문구였습니다. 문제는 그 옆의 기호들이었는데요. 기존 학계는 이걸 그저 빈자리를 채운 단순 장식으로 치부해 왔고, 박물관 도록조차 사진 프레임 밖으로 잘라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메러디스 교수가 다른 박물관의 디아트레타들을 차례차례 추적해 보니, 똑같은 기호가 여러 잔에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거죠. 그것도 4세기부터 6세기까지, 200년 넘는 시간을 가로질러서 말입니다.

이탈리아 노바라에서 발견된 트리불치오 디아트레타. 그물 위에 라틴어로 '많은 해를 살라'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고, 단어 사이사이에 작은 기호들이 박혀 있습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 José Luiz Bernardes Ribeiro

메러디스 교수는 2025년 《Journal of Glass Studies》 4월호에 첫 논문을 실었고, 같은 해 10월에는 《World Archaeology》에 후속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 핵심 주장은 이렇습니다. 디아트레타 표면의 작은 기호들은 장식이 아니라 공방을 표시한 일종의 시각 언어라는 거죠. 풀어 말하면 고대 로마판 브랜드 로고였던 셈입니다.

그녀는 이 결론에 이르기 위해 미완성 디아트레타 파편, 도구 자국, 비문을 함께 들여다봤는데요. 200년에 걸쳐 같은 기호가 나타난다는 점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같은 사람이 200년을 살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니 이 기호는 한 명의 거장이 아니라, 도제와 연마공, 조각공이 함께 일했던 특정 공방을 가리키는 표식이었던 거죠.

이건 단순히 '누가 만들었나'를 뛰어넘는 발견입니다. 지금까지 로마 사치품은 한 명의 천재 장인이 홀로 빚어낸 결과물로 여겨져 왔습니다. 디아트레타 한 점을 만드는 데 몇 년이 걸린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지만, 그 시간 동안 누가 어떤 역할을 분담했는지는 안갯속이었죠. 메러디스 교수의 가설이 옳다면, 후기 로마의 유리 공방은 우리가 떠올리는 르네상스 회화 공방처럼 여러 사람이 분업한 협업 집단이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또 다른 4세기 디아트레타. 안쪽 잔과 바깥쪽 그물이 가느다란 유리 다리로 연결돼 있어, 빛이 통과하면 공중에 부유하는 그물처럼 보입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 Vassil

재미있는 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이 기호들이 새겨진 위치인데요. 잔의 가장 잘 보이는 정면이 아니라, 뒷면이나 손잡이 안쪽, 즉 술을 따르는 사람만 손에 쥐었을 때 잠깐 보이는 곳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마치 현대 명품 브랜드의 안감 라벨처럼요. 메러디스 교수는 이것이 '아는 사람만 알아보는' 공방 인증서 역할을 했을 거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1,500년 동안 왜 아무도 이걸 알아채지 못한 걸까요? 메러디스 교수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엘리트 소비자에만 시선을 고정해 왔기 때문이라는 거죠. 누가 이 잔을 가졌는가는 끝없이 연구해 왔지만, 누가 이 잔을 만들었는가는 오랫동안 흐릿한 채로 남겨두었던 겁니다.

메러디스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증거를 한데 모아 놓고 보면, 이 공예가들에 대해 우리가 그동안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드러난다고 말이죠. 박물관 진열장 너머에서 우리를 응시하고 있는 건, 결국 익명의 손들. 200년 동안 같은 작은 기호 하나로 자기들의 존재를 후세에 남겨 둔 사람들이었던 거예요.

참고문헌

1. Meredith, H. (2025). "Looking for—and Finding?—Workshop Makers' Marks on Late Roman Diatreta" Journal of Glass Studies. DOI: 10.3998/jgs.6943

2. Meredith, H. G. (2025). "An approach to craft and craftworkers in process: re-examining late 3rd-6th century CE Roman carvings, inscriptions, and engraved symbols" World Archaeology. DOI: 10.1080/00438243.2025.2570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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