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 구데가 1889년에 그린 송네피오르의 바이킹 배.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 Hans Gude
13세기 아이슬란드의 어느 양피지 위에 한 무명의 필경사가 1,500명이 넘는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내려갔습니다. 누가 누구의 사촌이고, 누가 누구를 죽였고, 누가 누구와 혼인을 맺었는지 말이죠. 우리가 흔히 사가(Saga)라고 부르는 이 방대한 이야기 묶음에는 무려 18편의 영웅담이 담겨 있는데요.
그런데 800년이 지난 21세기, 영국의 한 통계물리학자가 이 양피지 속 1,500명의 관계를 컴퓨터로 분석한 뒤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발표합니다. 사가에 등장하는 바이킹 사회의 인간 관계망이, 우리가 매일 들여다보는 페이스북·인스타그램의 친구 그래프와 거의 똑같은 구조라는 거였죠.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리고 이 사실은 왜 그토록 중요한 걸까요?

Njáls saga 등 11편의 가족 사가가 묶여 있는 중세 아이슬란드 필사본 모드루발라보크(Möðruvallabók)의 한 페이지. 14세기 중반에 양피지 위에 손으로 쓰여졌습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 아르니 마그누손 연구소 소장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풀어 보기 전에, 먼저 사가가 어떤 글인지 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가는 9세기에서 11세기,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바이킹 시대라고 부르는 시기에 아이슬란드와 노르웨이 일대에서 벌어진 일들을 기록한 산문 서사시인데요. 정작 이 이야기들이 양피지에 적힌 건 사건이 일어난 시점으로부터 200~300년이 지난 13~14세기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학자들 사이에서는 오랜 논쟁이 있었죠. 사가에 적힌 인물과 사건이 정말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후대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신화인지 말입니다. 사가에는 분명히 황당한 장면들도 섞여 있습니다. 가령 《붉은 에리크의 사가》에는 북아메리카 해안에서 외다리 인간이 등장해 주인공의 아들을 활로 쏘고 강을 따라 깡충깡충 도망치는 장면이 나오죠.
하지만 또 어떤 사가는 마치 동네 신문처럼 사실적입니다. 누가 누구네 농장에서 양 몇 마리를 훔쳤는지, 사촌과의 결혼 분쟁을 의회(알팅)에서 어떻게 해결했는지가 깨알같이 적혀 있거든요.
이 오랜 수수께끼에 도전한 사람들은 의외로 역사학자도, 문헌학자도 아니었습니다. 영국 코번트리 대학(Coventry University)의 응용수학연구소에서 통계물리학을 연구하던 패드라이그 맥캐런(Pádraig Mac Carron) 박사와 랄프 케나(Ralph Kenna) 교수였죠.
두 사람은 사가 18편을 펼쳐 놓고,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을 점(node)으로, 그 인물들이 만나거나 대화하거나 혈연으로 얽힌 관계를 선(edge)으로 표시한 거대한 네트워크 지도를 그렸습니다. 그렇게 모인 인물이 무려 1,500명이 넘었죠. 그중 다섯 편의 가장 방대한 사가에서는 우호적 관계는 초록선, 적대적 관계는 빨간선으로 따로 구분해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인물(점)이 친분 관계(선)로 연결된 사회 관계망 다이어그램의 예시. 맥캐런과 케나는 사가 속 1,500여 명의 인물 관계를 이런 식으로 시각화한 뒤 정량 지표를 뽑아냈습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CC BY 3.0) / Maksim
분석 결과는 2013년 《유럽물리학회지 B》(European Physical Journal B)와 영국 왕립통계학회 학술지 《Significance》에 잇달아 발표됐는데요. 두 사람이 발견한 핵심 키워드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스몰 월드(small-world), 다른 하나는 동류 선호(assortativity)였죠.
스몰 월드라는 말이 좀 어렵게 들리지만, 풀어 보면 간단합니다. 임의로 두 사람을 골라도 그 사이를 잇는 친구의 친구의 친구... 의 횟수가 놀랄 만큼 짧다는 뜻이거든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여섯 다리만 건너면 온 세상이 다 친구다는 그 개념이죠. 그리고 동류 선호는 친구가 많은 사람은 친구가 많은 사람과 어울리고, 친구가 적은 사람은 친구가 적은 사람과 묶이는 경향을 의미합니다.
재미있는 건 이 두 가지 특성이 페이스북, 트위터, 휴대폰 통화 기록 같은 현실의 사회 관계망에서 똑같이 나타난다는 점이에요. 즉, 800년 전 양피지에 적힌 바이킹들의 인간관계가, 2026년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모양과 사실상 같다는 결론이 나오는 겁니다.

노르웨이 왕 올라프 트뤼그바손의 전설적 함선 오르멘 랑게(긴 뱀)를 그린 1899년 작품. 이 같은 영웅담의 줄거리 자체는 후대의 윤색이 들어갔지만, 등장인물들의 사회 관계망만큼은 실제 사회를 닮았다는 사실이 통계 분석으로 드러났습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 Halfdan Egedius
여기서 두 연구자는 한 발짝 더 나아갑니다. 그렇다면 명백히 허구로 분류된 이야기들의 관계망은 어떤 모양일까요? 비교군이 필요하잖아요.
맥캐런과 케나는 앞선 2012년 연구에서 고대 영시 《베오울프》,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그리고 아일랜드 신화 《타인 보 쿠일레이게》(Táin Bó Cuailnge)의 등장인물 관계망을 같은 방식으로 분석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 결과가 흥미로웠죠.
역사적 사건이 어느 정도 바탕이 됐다고 알려진 《베오울프》와 《일리아드》의 관계망은 사가와 마찬가지로 현실 사회망과 닮은 모습이었습니다. 반면 순수 신화로 분류되는 아일랜드의 《타인》은 전혀 다른 모양이었어요. 모든 사람을 다 알고, 모든 곳에 등장하는 슈퍼 인싸 캐릭터 몇 명이 관계망 전체를 지배하는 형태였거든요.
이런 형태의 관계망을 어디서 본 적이 있냐면, 바로 마블 코믹스의 슈퍼히어로 우주에서 볼 수 있습니다. 스파이더맨이 어벤저스도 알고, 엑스맨도 알고,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도 아는 식의 비현실적으로 잘 연결된 캐릭터가 존재하는 세계 말이죠. 즉, 완전한 허구는 인간 관계망에서도 자기만의 비현실적인 흔적을 남긴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이 연구가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결론은 무엇일까요? 사가에 적힌 모든 디테일이 다 사실이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외다리로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활을 쏘는 인간 같은 건 당연히 후대의 상상력일 거예요.
다만 사가가 묘사하는 사람들 사이의 얽히고설킨 관계 그 자체, 그러니까 누가 누구의 사촌이고 누구의 원수이고 누구와 동맹을 맺었는지 같은 사회의 뼈대는 실제 9~11세기 아이슬란드와 노르웨이 사회의 모습을 꽤나 충실히 반영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후대의 작가가 머릿속에서 1,500명짜리 가짜 사회를 통째로 지어내려 했다면, 그 결과물의 통계적 모양이 우리 시대의 페이스북 친구 그래프와 이렇게까지 닮을 확률은 매우 낮으니까요.
통계물리학이라는 도구가 800년 묵은 양피지를 펼쳐, 바이킹들이 우리와 그렇게 다르지 않은 관계망 속에서 살았음을 증명해 보인 거예요. 다음번에 도서관에서 사가를 펼쳐 들 일이 있다면, 그 안의 인물들 한 명 한 명을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진짜 어디선가 살아 숨 쉬었을 한 사람으로 떠올려 봐도 좋지 않을까요?
1. Mac Carron, P., & Kenna, R. (2013). "Network analysis of the Íslendinga sögur the Sagas of Icelanders." European Physical Journal B. DOI: 10.1140/epjb/e2013-40583-32. Mac Carron, P., & Kenna, R. (2013). "Viking sagas: Six degrees of Icelandic separation." Significance. DOI: 10.1111/j.1740-9713.2013.00704.x3. Mac Carron, P., & Kenna, R. (2012). "Universal properties of mythological networks." Europhysics Letters (EPL). DOI: 10.1209/0295-5075/99/28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