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파누이 라노 라라쿠 채석장에 흩어진 모아이 석상들. 출처: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 Mbmerino
라파누이(이스터섬)의 채석장 라노 라라쿠(Rano Raraku) 화구벽에 어중간하게 묻힌 채 잠들어 있는 거대 석상 모아이(moai). 무게는 보통 수 톤에서 수십 톤, 큰 것은 80톤이 넘죠. 약 95%의 모아이가 이 한 채석장에서 깎여 나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이 채석장 위로 작은 비행체들이 분주하게 날아다녔습니다. UFO도, 군용기도 아니었습니다. 미국 빙엄턴 대학교(Binghamton University)의 칼 리포(Carl P. Lipo) 박사 연구팀이 띄운 드론이었죠. 무려 11,000장이 넘는 항공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습니다.
연구진이 던진 질문은 단순하면서도 묵직했습니다. 도대체 누가 이 거대한 석상들을 만들라고 명령했을까요? 그리고 정말 한 명의 강력한 통치자가 모든 작업을 지휘했던 걸까요?

라노 라라쿠 화구 안팎에 흩어진 모아이들. 완성도가 제각각이라는 점이 이번 연구의 출발점이 됐습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CC BY 4.0) / Docrgd
사실 그동안 학계에서 통용되던 그림은 꽤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이집트 기자의 대피라미드처럼, 강력한 왕이나 사제 계급이 위에서 명령을 내리고 수많은 노동자가 일사불란하게 동원돼 거석을 깎아 옮겼다는 시나리오죠. 거대 구조물은 곧 거대 권력의 산물이라는 통념입니다.
그런데 라파누이 사람들의 실제 생활 양식은 이런 그림과 잘 맞지 않았습니다. 고고학과 인류학 자료들은 이들이 강력한 중앙 왕권 없이, 작은 가족 단위 씨족(clan)을 중심으로 분산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는 사실을 보여줘 왔거든요. 그렇다면 모아이는 어떻게 이 분산된 사회에서 만들어진 걸까요?
리포 박사 연구팀과 애리조나 대학교(University of Arizona)의 테리 헌트(Terry L. Hunt) 박사 연구팀은 답을 찾기 위해 라노 라라쿠 채석장 전체를 정밀 3D 모델로 복원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드론입니다. 11,000장이 넘는 항공 사진을 찍어 컴퓨터 비전 기법으로 이어 붙인 거죠.
연구진은 그렇게 만든 모델을 2025년 학술지 《PLOS One》에 발표한 논문에 담아 공개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델은 기존의 통념과는 사뭇 다른 풍경을 드러냈죠.
채석장 안쪽에는 깎다 만 모아이들이 한군데 모여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사면 곳곳에 작은 작업장들이 흩어져 있었고, 각 작업장마다 깎는 방식과 자세, 비율, 마감 처리 방식이 조금씩 달랐죠. 어떤 모아이는 거의 완성 직전까지 다듬어졌고, 또 어떤 모아이는 이제 막 윤곽을 떼어내기 시작한 단계였습니다.

라노 라라쿠 암벽에 새겨진 미완성 모아이. 망치돌만 옆에 두고 작업이 멈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 Rennboot
연구진은 이 모습을 한 줄로 이렇게 요약합니다. 채석장 풍경은 통일된 설계도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 사업의 풍경이라기보다, 여러 팀이 자기 방식대로 일하는 일종의 프리랜서 작업장에 가깝다는 거죠. 한 명의 큰 머리, 그러니까 모든 걸 지휘하는 우두머리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던 셈입니다.
실제로 채석장의 한쪽 구석에서는 키 큰 모아이가, 또 다른 구석에서는 어깨가 두툼한 모아이가 동시에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만약 한 명의 권력자가 모든 걸 통제했다면 이렇게 양식이 들쭉날쭉할 이유가 없죠. 작은 가족 단위 씨족들이 각자의 취향과 솜씨로, 자기 조상을 위한 석상을 따로따로 깎아 내린 풍경에 훨씬 가깝다는 해석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깎는 건 그렇다 쳐도, 이걸 옮기는 건 또 다른 이야기 아닐까요? 수십 톤짜리 돌덩이를 산기슭에서 해안가 제단 아후(ahu)까지 끌어가려면 결국 거대 동원력이 필요했을 텐데 말이죠.
리포 박사와 헌트 박사는 사실 이 질문에도 이미 오래 전 답을 내놓은 바 있습니다. 두 사람이 2013년 《Journal of Archaeological Science》에 발표한 워킹 모아이(walking moai) 가설이 그것이죠. 모아이의 무게중심을 아래쪽 배 부분에 둔 형태로 깎았더니, 양옆에서 밧줄로 번갈아 잡아당기기만 해도 좌우로 흔들거리며 앞으로 걷듯 이동했다는 거예요.
두 사람은 4.35톤짜리 콘크리트 복제 모아이로 직접 실험을 해 봤습니다. 그 결과 단 18명만으로도 도로 위에서 모아이를 충분히 옮길 수 있었다고 합니다. 통째로 굴리는 통나무도, 거대한 사다리도 필요하지 않았던 거죠. 사실상 한 가족 클랜 정도만 모여도 가능한 인원이었습니다.
이번 채석장 분석은 그 워킹 가설과도 자연스럽게 맞물립니다. 만드는 사람도 옮기는 사람도 결국 큰 권력 조직이 아니라, 십수 명 단위로 움직이는 작은 공동체였다는 그림이죠. 그래서 연구진은 라파누이 사회를 새롭게 그려보자고 제안합니다. 거대한 왕이 명령하는 피라미드형 사회가 아니라, 수많은 작은 손길이 모여 만들어낸 분산형 협업의 결과물로 말입니다.

라노 라라쿠 채석장 일대의 파노라마. 사면 곳곳에 모아이가 흩어져 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 Bjørn Christian Tørrissen
재미있는 건 이 결론이 모아이를 더 작아 보이게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정반대죠. 한 명의 강력한 왕이 수만 명을 동원해 만든 게 아니라, 분산된 작은 공동체들이 자율적으로 움직여 이 거대한 석상들을 깎고 또 옮겼다는 해석은, 라파누이 사람들이 가졌던 협업 능력과 공학적 감각을 한층 더 빛나게 만듭니다.
거대 구조물 뒤에는 반드시 거대 권력이 있어야 한다는 통념이, 이번 연구로 다시 한 번 흔들리고 있습니다. 수백 년 전 사람들이 남긴 돌덩이 하나하나가 사실은 우리가 상상해온 것과 전혀 다른 사회의 풍경을 들려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죠. 다음에 라파누이 사진을 보게 된다면, 그 뒤에 서 있는 게 한 명의 왕일지 아니면 한 묶음의 가족들일지 한 번쯤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1. Lipo, C. P., Hunt, T. L., et al. (2025). "Megalithic statue (moai) production on Rapa Nui (Easter Island, Chile)." PLOS One. DOI: 10.1371/journal.pone.03362512. Lipo, C. P., Hunt, T. L., & Haoa, S. R. (2013). "The walking megalithic statues (moai) of Easter Island." Journal of Archaeological Science. DOI: 10.1016/j.jas.2012.09.029